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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고성 이씨에 대해서 알려 드립니다

헬시큐브 2023. 4. 8. 19:32


『고성 이 씨 명현 열전(名賢列傳)』에 의거, 중국 전한 문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2] 고성 이 씨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반(槃)은 춘추전국시대 인물인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70년을 있다가 나이 70에 자두나무 밑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만물의 이치를 모두 깨우치고 있었다고 하며,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나 성을 이(李)씨로 정했다고 한다. 노자의 본명은 이이(李耳)이다.

고성이 씨는 중국 성은 아니고 동이족입니다

 

사암공파(思菴公派): 이원(李原)의 7남이지(李墀)를 중시조로 한다.

고성이 씨 대표:
이상룡 임청각. 독립운동.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한동 국무총리
이기백 국방부장관
이기준 서울대 총장
이상희 과기처장관
이영창 서울시경찰청장. 국회의원
이동흡 헌법재판관
이석제 감사원장. 총무처 장관
이수정 문화부장관
이영진 충남도지사. 국회의원
이웅렬 중도일보 설립자/회장
이군현 국회의원 (17.18.19.20대)
이용득 국회의원
이종명 국회의원
이종주 대구시장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 이상희의 친형
이현동 국세청장
이효수 영남대학교 총장
이유근 경남과학기술대 총장
이호영 국무총리비서실장
이인용. mbc아나운서. 삼성 사장
이소라 가수
이서진 탤런트
이필모 영화배우

 


☆ 고성 이 씨 관련 동영상자료

https://youtu.be/OiS60 e4 Md6 A


https://youtu.be/Vr4 CZhIOMeY


https://youtu.be/jPkyC66 nhSg


임 청 각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1858-1932)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본관은 고성이며, 호는 석주입니다.

임청각의 주인인 고성 이 씨 가문은 고려 무신정권기에 중앙 정계에 등장하여 조선 세조 때에 이르기까지 크게 현달했습니다. 그러나 석주 이상룡의 위 선대인 이증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합니다.

이증의 자손들 역시 과거에 급제했으나, 연산군 시기 벌어진 사화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이증의 셋째 아들인 이명이 1519년(중종 14) 낙동강 강변에 임청각을 지으면서, 고성 이 씨 종택 임청각의 기초가 마련됩니다.

☆ 독립정신이 깃들어있는, 안동 임청각
출처 : 문화재청.. | 블로그
; - https://naver.me/5P2ijli5

 

독립정신이 깃들어있는, 안동 임청각

2019년은 독립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해입니다. ...

blog.naver.com


안동의 임청각은 고성이 씨 종가이다.
종가는 대개 불천위 조상의 적장자로 이어진 가계를 뜻한다. 종손의 가장 큰 역할은 조상의 제사를 근실하게 모시고 손님을 잘 접대하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역할만으로는 종가와 종손의 권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종가의 불천위가 종족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국가와 사회 전체에 기여했듯, 이제 과거의 사실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하여 실천하는 것에서 종가와 종손의 권위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고성이씨 종가 임청각은 쇠락하고 약화된 종가이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모범적인 종가이다. 나라가 망하는 국난을 맞아 가진 자, 권위 있는 자에 머물지 않고 고통스러운 시대의 책무를 자원함으로써 임청각은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  고아원에서 살았던 독립투사의 증손들… 일가족 망명한 임청각의 사연
- https://naver.me/x220tG8k

 

고아원에서 살았던 독립투사의 증손들…일가족 망명한 임청각의 사연

얼마 전에 경북 안동 임청각이라는 유서깊은 가옥이 일제강점기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보물 182호로 지정된 집인데요. 7년간 280억원을 들이는 사업이랍니다. 일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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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어 나라의 주인이 백성임을 밝혔으며, 1911년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는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또 1923년에는 「자유도설(自由圖說)」을 통해 “자유의 반대는 노예이니, 자유를 완전히 보존하고자 한다면 우선 노예의 습관을 혁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