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컨텐츠

중국 송가황조 세 자매 이야기

헬시큐브 2023. 4. 11. 23:35

*돈을 사랑한 첫째딸 쑹아이링 (송애령)~ 남편, 쿵샹시(공상희) / 중국 최대부자

*인민을 사랑한 둘째딸 쑹칭링(송경령)~ 남편,;손 문 / 공산당혁명지도자

*권력을 사랑한 막내딸 쑹메이링(송미령) ~ 남편, 장개석 / 국민당총통

송가수의 세자매 이야기 ~~

"장개석의 아내가 된 막내.송미령, 모택동의 정신적 지주 손문(손중산)의 아내가 된 둘째.송경령, 공자의 75대손 은행재벌의 아내가 된 장녀.송애령,이 세 자매의 삶을 통해 중국 근대사를 가볍게 꿰뚫어본다"

중국 근대사는 굉장히 어렵다.
우리는 21세기를 살면서도 사실 대만이 왜 아직도 세계 무대에서 마음대로 국기를 흔들 수 없는지 ~~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그 어떤 사람도 가볍게 중국의 공공의 적이 되어야 하는지
흐릿하게만 인지한 채 세계사 라는 커다란 지구본 위를 살아가고 있다.

중국의 근대사를 머리 속에 또렷이 새길 수 있는 송씨 가문의 세 자매의 삶은
오늘의 중국을 있게 만든 근간이 될 정도로 요란스럽다.

세 자매는 개혁주의자 아버지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공부한다.
그리고 세 자매가 돌아온 중국은 청조가 몰락하는 격변의 세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장녀 송애령은 거부의 꿈을 갖고 있었다.
공자의 75대 손이라는 재벌은행가
공상희 ( 쿵샹시 )에게 정략적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둘째 송경령은 아버지와 힘을 모아 신해혁명을 일으켰던
중국의 정신적 지주 손문(손중산)과 결혼 한다.
자신의 친구이자 이미 조강지처가 있는 손문(손중산)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딸 앞에서 아버지는 망연자실하지만 워낙 딸의 결심이 단호해서 아버지 송자수는 막을 수가 없었다.

막내 송미령은 역시 유부남이자 훗날 대만의 총통이 되는 장개석과 결혼을
하게 되며, 이제 이 세 자매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하다.
손문의 일급 부관이었던 장개석은 뼈속깊이 공산주의 사상을 증오하는 인물이다.

그는 손문(손중산)과의 遺志를 무시한 채 국민당 내 공산주의자들을 대량 학살함으로써, 두 자매의 정치적 대립도 벼랑까지 내어몰린다.

 

이런 격세 중에 일본군이 중국대륙을 침략하게 되고, 그 와중에서도 철저하게 공산당을 처단하기에 급급한 장개석...마침내 둘째는 장개석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막내를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는다

둘째와 막내가 첨예한 정치적 대립의 남편들 사이에서, 온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가운데 장녀 송애령은 남편 공상희의 부를 등에 업고
탁월한 재화의 감각으로 닥치는대로 은행들을 매입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급속하게 중국의 경제력을 장악해갔다.

송애령은 송가왕조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송애령은 상해에서 태어나서, 1904년 미국유학을 한다. 1910년 졸업하고 귀국한다. 그녀는 먼저 손문(손중산)의 비서가 되고, 나중에 여동생 송경령을 소개하여 그 업무를 맡게 한다. 이리하여 손문이 송경령과 만날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송미령과 장개석의 혼사에서도 송씨집안이 일치하여 반대할 때, 바로 송애령의 적극적 지지로 성사된다. 장씨-송씨의 결혼은 중화민국역사에 중요한 사건이 된다.

항일전쟁시기에 송애령은 송경령, 송미령과 함께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하고, 중국공업합작사를 지지하고,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부녀지도위원회를 조직하며, 중국아동복지회를 창설하며, 홍콩상병지우협회 회장을 맡는다. 송애령은 대일항전에 열심이었고, 기부하거나 모금하는 측면에서 많은 일들을 했다. 송씨 신화의 창조자이면서, 송가왕조를 장악한 진정한 설계자였다.

송애령은 정치무대에서 얼굴을 내미는 일은 드물었지만, 송씨가족이 굴기한 후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녀는 단지 그녀의 남동생, 여동생과 남편을 조종하여 국가대계를 움직이는 수렴청정의 여인이었다.

이 자신의 한손으로 셋째여동생과 장개석의 결혼을 이루게 해주고, 둘째 여동생과 손문 (손중산)의 혼인에 대하여는 계속 불만을 가지고, 둘째여동생 송경령에 대하여는 수족지정(手足之情)이 있으면서 또한 동근상전(同根相煎)의 양면을 가진 인물이었고, 서양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중국의 인정과 세상을 잘 알아 삼교구류의 인물과도 잘 관계를 맺었던 여강자이며, 겉으로는 온화하고 우아하면서 심계가 깊고, 경영에 뛰어나며, 재물운이 형통한 여부호이다. 그녀는 아주 재미있고, 깊이 생각할만하며, 귀감으로 삼을만한 인생궤적을 살았다.

 

"사대가족"의 진정한 수뇌는 송애령이 아니면 안된다. 송애령은 송미령을 통하여 장개석을 조종했다.

송애령의 교묘한 수법은 놀라울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전방은 먹을 게 없고, 후방은 빨리 먹어치우는(前方吃緊 後方緊吃)"의 모습이다. 공상희가 재정부장을 맡고 있던 시기에 국민정부는 군용비행기를 구입했는데, 송애령은 매번 거기서 커미션을 챙겼다.

장씨, 송씨 및 그 자녀들이 재물을 긁어모을 때 송미령이 개인적으로 재물을 챙겼는지 여부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명할 길이 없다; 다만, 중경, 남경시대에 송애령, 송미령 두 자매가 손을 잡고 이익을 챙겼다는 주장은 많이 있다.

즉, 공상희는 외환을 조작하고, 공채를 조종하며, 은가격에 투기했다는 것이다.

송씨 세자매간에는 아주 복잡한 관계를 나타나고 있다. 수족간의 가족의 정도 있고, 은원도 있으며. 정치도 있고, 사랑과 원한도 존재 한다. "세자매의 이야기"는 역사, 정치, 외교, 금전, 감정과 투쟁의 종합이야기가 흥미진진 하며. 그리고 하나의 경전적인 권력과 매력이 융합된 살아있는 한편의 역사 서사시 이다

둘째 송경령이 손문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장녀 송애령은 자기의 체면을 위하여 자기의 친여동생인 송경령과 관계를 단절 한다.

자기의 원한을 위하여 영한(寧漢, 남경과 무한)분열시, 그녀는 장개석을 지지하고, 자기의 여동생과 반대편에 서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의 정치와 경제욕망을 위하여 자기의 여동생 송미령을 장개석의 품으로 밀어넣었다.

장녀 송애령의 성격은 세자매중 가장 강했다. 서가함(徐家涵)에 따르면,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의 세 가족간에 내부마찰이 생겨서 서로간에 해결이 되지 않으면, 단지 그녀(송애령)가 큰언니로서 나서서 중재하여 해결하였다. 그녀는 평소에는 집안에 깊이 들어박혀 바깥출입을 많이 하지 않았고, 송미령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세력은 직접적으로 국가대사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고, 장개석도 그녀에게는 30%쯤 양보했다고 장개석의 조카손자인 장효진은 일끼지 군통의 두목인 대립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위원장(장개석)의 병은 송미령이 치료할 수 있고, 부인(송미령)의 병은 공부인(송애령)이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송애령의 남편 공상희 (쿵샹시) 의 병(부패탐욕)은 아무도 치료할 수 없다."

 

공상희.송애령
손문.손경영
장개석.송미령

1947년, 큰딸 송애령일가는 미국으로 가서 송애령은 1973년 10월 19일 뉴욕에서 병사했다. 당시의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썼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흥미를 갖게 하고 약탈적인 성격을 지닌 주민이 어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거했다. 그녀는 금융상에서 거대한 성취를 얻은 부녀이고, 세계에서 드물게 보는 자신의 정명한 수단으로 재산을 긁어모아 가장 돈있는 부녀가 되었고, 송미령과 장개석을 소개한 중매쟁이 이며, 송씨신화의 창조자이고, 송씨왕조의 권력장악의 설계자였다" 이로써 볼 때, 그녀가 중국역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